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파울 요제프 괴벨스/생애 (문단 편집) === 취임 === >'''자, 트럼펫 연주자도 이제 무엇인가 돼야겠지!''' >-1933년 3월 14일, [[파울 폰 힌덴부르크]] 대통령이 괴벨스의 장관 임명 서류에 서명을 하며- 1933년 총선 선거유세에서 괴벨스는 힌덴부르크를''' '탁월하고 영웅적 인물!', '존경스럽고 지칠 줄 모르는 민족의 지도자', '백전백승의 독일군 원수' '''라고 아첨을 떨어댔고 이에 안 그래도 날이 갈수록 히틀러의 정국 운영에 매우 만족한 힌덴부르크 대통령은 옛 원한을 잊고 선심을 쓴다. 물론 자칭 '''전직 화가''' 북치기 선동꾼 보헤미안 상병[* 히틀러는 나치당 초기 듣보잡이던 시절 아직 메시아적인 확신을 못 느꼈을 때 자신을 [[세례자 요한|북 치는 사람]]이라고 겸손하게 표현했다. [[예수|자기보다 나을 사람]]이 올 것이라며.]에 비하면 나팔수 '박사님'이야 자격이 넘치지만(...).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Bundesarchiv_Bild_183-S38324%2C_Tag_von_Potsdam%2C_Adolf_Hitler%2C_Paul_v._Hindenburg.jpg|width=450]] 상병과 원수의 악수. 장관 감투에 대한 화답으로 괴벨스는 선거 후 3월 21일을 '민족 봉기의 날'로 선포하고 원래 나치당 행사로 꾸미려던 데서 계획을 변경, 힌덴부르크와 히틀러의 역사적인 악수 사진이 나온 행사를 만들어버렸다. [[포츠담]] 상수시 궁전에서의 엄숙한 의식은 나치당 돌격대원 장례식으로 다져진 행사 전문가인 괴벨스에게는 주 전공이나 다름없었다. 이 행사는 '기성세대와 신세대의 갈등을 화해로 마무리짓고, 새로운 독일의 출발이라는 민족적인 감동을 일으켰다'라는 평가가 나올 정도로 꽤 호평을 받는다. 히틀러 정권에서 새로 만든 국민계몽선전부(Reichsministerium für Volksaufklärung und Propaganda) 조직은 베를린과 나치당 선전부에서 고대로 인원을 Ctrl+C, Ctrl+V한 조직이었고 괴벨스도 이를 부인하지 않았다. 오히려 당당하게 '''"이 부서는 정부에서 월급을 받아먹는 나치당의 조직이다!"'''라고 선언했다. 나치당의 깡패 이미지와는 별개로 초기 350여 명의 선전부 조직은 대졸자들이 절반이 넘었고 박사 학위자들도 상당했다. 100여 명은 황금당원 뱃지[* 나치당에서 특별한 공적을 세우거나 당원번호가 10만번 이하인 당원. 마그다 괴벨스는 히틀러가 죽기 직전에야 황금당원 뱃지를 받는다.] 보유자로 열성분자에 대부분이 30세 이하로 나치당의 다른 조직보다도 훨씬 젊었다. 괴벨스의 오른팔이자 [[차관]]인 전직 교사 출신 카를 한케는 29살에 불과했을 정도. 괴벨스는 부서 명칭에 대해서 불만이 많았는데, [[선전]]([[프로파간다|propaganda]])은 누가 보더라도 '''오해할 소지'''가 넘쳐났기 때문이었다. 이것은 '선전'이란 단어에서 풍기는 [[세뇌]]의 거부감과 선전 수단의 '천박함'이 원인이었다. 괴벨스가 원한 부서의 이름은 선전 대신 문화나 교육이었다[* 선전부의 선전 활동은 '''문화정책을 관장하면서''' 이루어졌는데, 비슷한 사례로 한국의 구 문화공보부가 있다.]. 하지만 문화나 교육을 몽땅 통째로 괴벨스에게 맡기는 건 안 그래도 나치당 내 [[완장]] 차고 싶어 줄 선 많은 사람들의 반발도 거셌고, 히틀러도 1인에게 권력을 몰빵하는 걸 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결국 괴벨스는 지금까지도 악명을 떨치는 나치의 국민계몽선전부 장관이 되었다. 어쨌든, 부모에게 손 벌리던 '가련한 아이'가 10년 만에 장관이 되었다. 괴벨스의 나이가 불과 35세일 때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